임 가밀로 신부 서한 69, Mutel 문서 1908-12/매괴성모당, 1908.1.20.
주교님께,
지난 목요일 안성에서 돌아오니 주교님의 9일자 서신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좀 더 일찍 답신을 올리려 했으나, 생각처럼 서신들을 발송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체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며, 겨우 전일에서야 안성 우체국장과 만나서 제게 오는 서신을 너무 늦지 않게 배달하도록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성모님을 위해 몇 가지 말씀 올리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성모님은 프랑스 루르드에서처럼 제 본당에서는 아직 기적을 행치 않으셨습니다. 저희는 이러한 특별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만 우리 교우들이 지닌 성모님에 대한 신앙심으로 볼 때 저는 조선이 장래에 성모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제 됩니다. 그러나 저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늘에 계신 성모님께서 기적을 행치 않으셨다 하더라도, 주교님께 축복을 내리신 것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는 매괴 성모성당이 오늘날 장호원의 큰 장터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또 몇 년 전에는 단 한명의 교우도 없었다는 사실과 과거에 저희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취급한 사실이 있었지만 오늘날은 성당 주변에 30가구 이상의 교우 가족이 있다는 사실과 지금은 천주교를 존경심으로 대한다는 것 등입니다.
1894년 성사를 주러 다닐 때 장호원을 가로질러 갔었는데 산기슭 마을 동쪽 끝에 아름다운 벽으로 둘러쳐진 큰 기와집 한 채가 그 주위의 초가집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언뜻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만일 성모님께서 원하신다면, 성모님께서 이 집을 거처로 택하실 것이고, 저는 이 집의 하인이 되어 성모님과 제가 부엉골의 누추한 집에서보다 더 안락하게 기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염원이 곧 실현되리라고 믿었습니다. 위집은 민비의 외척 민응식의 소유로, 민비는 1882년 조선이 혼란하던 시기에 이곳에 피신하였었습니다. 민비가 살았던 초가집터는 현재 정원으로 변했습니다. 민응식은 그의 친척들과 마찬가지로 서슴없이 부정한 수단으로 재산을 모으거나 세력을 넓혔습니다. 그는 젖을 짜기에 좋은 기회, 말하자면 가난한 주민들의 재산을 긁어모으는 큰 죄를 저지르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민비가 떠나가자마자, 그는 민비가 자기 집에 다시 거처할 경우에 대비하여 더 안락한 집을 지을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자들은 대형 석재, 건축용 목재와 기와 공급을 담당했으며, 가난한 서민들은 고된 부역을 해야 했습니다. 몇 달 내에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집이 세워졌고, 다가오는 민비의 행차를 기다리며 민응식은 이 집에 기거했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산은 어떤 곳에서도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므로, 민응식은 격언에 이르는 대로 불행을 겪고 말았습니다.
민비는 1895년 살해되었고, 일본인들은 그들의 적이 된 몇몇 민 씨 일가 사람들에게 추방을 조용했습니다. 이에 조선인들은 왕비의 복수를 하기 위해 봉기했습니다. 민응식은 전신시설 관리를 맡고 있던 장호원의 일본 초소 옆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리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일본군들은 해롭게 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일본군들은 민 씨 집을 자기네들 집처럼 거닐었으며 여자들 전용 내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집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집이라고 주장해봤자 소용이 없었으며 일본군들은 들은 척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번갯불 이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던 그가 퇴거라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1896년 1월이었습니다. 저는 6,000냥에 그 집을 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저는 4,000냥이면 그럭저럭 되겠거니 했는데 그 많은 돈을 모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가 2년 전에 성모님께 기도를 올린대로 성모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실현되었습니다. 4월 달에 수천명의 의병이 장호원의 일본초소를 공격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던 민 씨의 집은 의병 사령부가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3일간의 전투 후에, 식량이 떨어져 황혼을 틈타 퇴각한 반면, 의병은 술에 취하여 마을 전체에 불을 질렀고 탄환을 남김없이 쏘아댔습니다. 공포에 질린 양민들은 달아났고, 일본군은 방어할 수 없게 되자 사령부에 불을 질렀습니다. 다음날 불쌍한 양민들은 자기 집들이 불탄 것을 보고 타다 남은 사령부를 남겨달라고 간청한 결과 일본군들은 불 지르는 것을 멈추었고, 몇몇 건물이 남게 되었습니다. 일본군들은 이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여 불을 진압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들었고, 나라 안은 무정부 상태가 되어 사람들은 무엇이건 간에 매매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때가 과감한 시도를 해볼 좋을 기회로 여겼으며 잿더미가 된 대궐 같은 집의 잔해를 구입하도록 중개인을 보냈는데, 성모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188 피아스트르의 헐값을 지불하고 집을 구입했습니다. 그 집엔 외벽, 아름다운 주춧돌, 건축 석재, 남아 있는 몇몇 건물, 정원, 시간이 흐를수록 저에게 활기를 주는 동산 등, 모든 것이 전에는 수천냥의 값어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얼마 후 험담으로 저를 민 씨와 같은 운명으로 놓으려 했던 일본군들과 사이가 나빠졌으나 저의 보고를 통하여 콜랭 드플랑시 공사가 개입한 덕택으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잘못을 저지른 사실을 확인하고는 후회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이곳을 선택하시면서 제가 이 폐허 위에 세우려고 한 성역(聖域)을 위해 성모님이 원하신 주보성인명을 가리키는 듯 했습니다. 집 뒤에 있는 산이 매괴산이라고 불려지므로 이 성당의 이름을 매괴의 성모성당으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재원이 없었기 때문에 성당 건물은 1903년에야 세워졌습니다. 이 해에 악마는 자기가 골탕 먹고 있음을 보고는 민비를 추모하여 출입구 바로 앞에 절을 세우게 함으로써 방해를 하려했습니다. 외인들이 공사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에게 성모성당 건립을 반대했는데 저는 즉각 회신으로, 성모님께서 이곳을 소유하셨으며 또한 그분의 의지와 반대되는 표시가 없는 한 주어진 권리를 단념치 않을 것이며, 저는 올해 건설할 것인즉 일꾼들을 즉시 보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장차 저의 반응을 살피는 것에 불과함을 증명할 뿐입니다. 절이나 궁궐 건립 계획은 이 계획 추진자들의 그 일을 뽐내기 위해, 또 바닥날 그들의 재원을 위해 양민의 재산을 가로채는 그럴듯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건립 지지자들의 수치로 변한 것입니다. 악마는 이번에도 물러갔으며 성모님께서 이곳의 주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매괴 성모성당은 이제 매산 기슭에 자랑스럽게 세워져 있습니다. 이 성당은 기도하는 교우들의 피난처이며, 지난여름에는 외인들의 피난처도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엄마 품에 안기듯이 교우들과 특히 외인들이 의병과 일본군이 싸우는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매괴 성모성당에 와서 구원을 간청했습니다. 이 가련한 사람들은 성당 마당에 들어오자마자 자기들이 무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전투 때, 총알이 제일 먼저 성당 바로 뒤에 있는 장미산 허리에서 발사되었고, 저는 저희들이 이 혼란에 대한 댓가를 일부 감당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우리 쪽에서 빗발치는 총알이 지나가도록 얼마동안 떨어져 있는 것이 신중한 행동인 듯 했으나 저는 이런 생각도 못했고 처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저희 성당에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이 가련한 사람들이 지닌 신뢰심을 성모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일본군이 상대편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왜 응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외인들은 처음에 발사된 총소리들을 들었다고 합니다). 전투는 그 후 좀 더 먼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저는 매괴 성모성당이 부드러운 손길로 저희를 계속 보호해주시고 또한 성모님의 보호로 빗발치는 총탄을 피할 수 있었던 가련한 외인들을 사탄의 독수(毒手)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을 성당으로 인도한 것이 두려움이 아니고 자비로우신 성모님을 찾아뵙도록 인도한 믿음과 사랑이기를 바랍니다. 매괴 성모성당이 너무 좁으므로 더 넓고 더 견고한 건물을 건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귀의의 은총으로 저는 주교님께, 저를 둘러싸고 있는 주민들을 위하여 저와 함께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