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가밀로 신부 서한 23 Mutel 문서 1898-161 장호원, 1898.4.24. 주교님께, 상해에서 돌아온 후 서울 인편이 없어서 편지를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주교님의 건강이 나아졌다니 우선 진실로 축하를 드리는 바입니다. 주교님께서 너무 양심의 소리에만 귀를 기우리시어 건강히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서둘러 성무에 종사하지 마시기를, 또 주교님을 괴롭히던 이질 증세를 황해도에 모두 털어버리고 오셨기를 바랍니다. 한때, 주교님께서 남겨 놓고 가신 이질을 제가 물려받았나 하는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물려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큰 영광으로 알고 받아들이겠지만 그렇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이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저는 그것이 떠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저의 배에 플라밀로 된 띠를 두르고 다닙니다. 제가 띠를 풀고 다니면 그가 오해를 하고 또 저를 찾아올까 두려워 계속 매고 다닙니다. 저는 성사집전에서 118명에게 영세를 주는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작년은 어느 해보다도 어려움이 많았던 해이지만 사실 작년처럼 많은 문제로 골치를 앓은 해도 없었습니다. 별 걱정거리 없이 보낸 날을 열 손가락 안에 셀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며칠이나마 편히 보낼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악마가 멸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는 가운데 부딪히는 역경과 실망에 대한 최대의 보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번 봄철에 성무를 집행할 수 있었더라면 영세를 받은 사람의 숫자가 150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타케 신부(Taquet, 한국명 嚴宅基. 1898년 조선에 입국한 그는 부이용 신부와 함께 잠깐 동안 사목실습을 하다가 부산진(釜山津)으로 부임하였다)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신부님을 혼자 두고 떠날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이곳 장호원에는 기근이 날이 갈수록 그 도를 더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몇 군데 시장에서 팔기 위해 2,000~3,000가마의 쌀이 공급되었지만 장날인 오늘 시장에서는 쌀 한 톨도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도 쌀 몇 가마가 공급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구매자끼리의 싸움이 일어났고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값이 엄청나게 비싸서 1말당 1피아스트르에 거래가 되었습니다. 보리를 수확하려면 한 달 반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견뎌낼지 궁금합니다. 제가 돈이라도 많다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자선이라도 베풀 수가 있을 텐데 어린이 구호 기금을 모금하는데 겨우 보탤 수 있을 정도이니 저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주교님께서 보내시는 돈을 도둑들이 가로채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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